정치

이재명 대통령 당선,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제3후보'의 이야기

Mehigh 2025. 6. 4.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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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졌습니다.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이라는 격동의 시간을 겪으며 치러진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로 당선되었습니다. 전국 최종 투표율은 무려 79.4%, 3,524만 4,106명의 국민들이 뜨거운 민심을 투표함에 담아냈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4일 오전 5시 10분 개표율 100%를 기준으로 이재명 후보는 1,728만 7,513표(49.42%)를 획득하며, 1,439만 5,639표(41.15%)를 얻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를 8.27%p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을 확정 지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주목할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였습니다. 그는 8.34%라는 적지 않은 득표율로 제3후보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가 당선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준석 후보는 왜 출마를 강행했을까요? 그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요? 이는 비단 이준석 후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정치사 속 수많은 제3후보들, 그들은 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그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보고자 합니다.

 


역대 대선, 그들은 왜 '제3후보'로 뛰어들었나?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직접선거와 간선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특히 간선제 시기에는 단독 후보가 많아 '제3후보'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려웠죠. 제1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 간선이었고, 3.15 부정선거 이후의 선거도 간선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선제를 중심으로, 유의미한 득표를 얻거나 선거 구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는 역대 제3후보들을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제3후보'는 1, 2위 후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로 기준을 삼습니다.

 

  • 제1대 대통령 선거 (1948년 7월 20일) - 국회 간선
    • 선출 방식: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 1위 후보: 이승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80표 (91.8%)
    • 2위 후보: 김구 (한국독립당) - 13표 (6.6%)
    • 제3후보: 무소속 기타 후보들이 있었으나, 득표율이 매우 미미하여 유의미한 제3후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 특징: 초대 대통령 선거로, 해방 후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국회 간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제2대 대통령 선거 (1952년 8월 5일) - 직선제 (발췌개헌)
    • 1위 후보: 이승만 (자유당) - 74.6%
    • 2위 후보: 조봉암 (무소속) - 11.4%
    • 제3후보: 이시영 (무소속) - 10.9%
    • 출마 원인: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발췌개헌)을 통해 재선에 성공한 선거입니다. 이시영 후보는 야권의 주요 인사였으나, 이승만-조봉암의 양강 구도 속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시영
  • 제3대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 - 직선제
    • 1위 후보: 이승만 (자유당) - 70.0%
    • 2위 후보: 조봉암 (무소속) - 30.0%
    • 제3후보: 신익희 (민주당) - 투표 전 사망하여 득표 없음.
    • 출마 원인: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대한 야당의 견제와 민주화 열망을 대변하며 출마했습니다. 신익희 후보는 선거 운동 기간 중 사망하여 많은 유권자에게 안타까움을 주었으며, 사표(死票)가 다수 발생했습니다.
      신익희
  • 제4대 대통령 선거 (1960년 3월 15일) - 직선제 (3.15 부정선거)
    • 1위 후보: 이승만 (자유당) - 100% (당선)
    • 2위 후보: 조병옥 (민주당) - 선거 전 사망
    • 제3후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특징: 3.15 부정선거로 인해 이승만 후보가 단독으로 당선되는 형식이었으며, 이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정상적인 경쟁 구도가 아니었으므로 제3후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 제4대 대통령 선거 (1960년 8월 12일) - 국회 간선
    • 선출 방식: 4.19 혁명 이후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 1위 후보: 윤보선 (민주당) - 79.1%
    • 2위 후보: 김창숙 (무소속) - 11.0%
    • 제3후보: 무소속 기타 후보들이 있었으나, 득표율이 미미했습니다.
    • 특징: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을 위한 과도기적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 제5대 대통령 선거 (1963년 10월 15일) - 직선제
    • 1위 후보: 박정희 (민주공화당) - 46.6%
    • 2위 후보: 윤보선 (민정당) - 45.1%
    • 제3후보: 오재영 (추풍회) - 1.4%
    • 출마 원인: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종식 후 첫 민선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강 구도 속에서, 다른 후보들은 큰 득표율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박정희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소수 득표도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오재영
  • 제6대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 - 직선제
    • 1위 후보: 박정희 (민주공화당) - 51.4%
    • 2위 후보: 윤보선 (신민당) - 40.9%
    • 제3후보: 전진한 (한국독립당) - 0.5%
    • 출마 원인: 이 선거도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강 구도가 뚜렷했으며, 박정희 후보가 50%를 겨우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여 다른 후보들의 미미한 득표도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전진한
  • 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4월 27일) - 직선제
    • 1위 후보: 박정희 (민주공화당) - 53.2%
    • 2위 후보: 김대중 (신민당) - 45.3%
    • 제3후보: 진복기 (정의당) - 1.0%
    • 출마 원인: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후 치러진 선거로, 박정희-김대중의 치열한 양강 구도가 특징이었습니다. 진복기 후보는 소수 진보 정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큰 영향은 없었습니다.

      진복기
  • 제8대 대통령 선거 (1972년 12월 23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유신헌법)
    • 1위 후보: 박정희 (민주공화당) - 99.9%
    • 제3후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특징: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사실상 박정희 단독 출마 형식으로 경쟁 후보가 없었으므로 제3후보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 제9대 대통령 선거 (1978년 7월 6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 1위 후보: 박정희 (민주공화당) - 99.8%
    • 제3후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특징: 제8대 선거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박정희 단독 출마 형식으로, 제3후보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 제10대 대통령 선거 (1979년 12월 6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 1위 후보: 최규하 (무소속) - 96.3%
    • 제3후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특징: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치러진 과도기적 상황의 선거로, 사실상 단독 출마 형식이었으므로 제3후보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 제11대 대통령 선거 (1980년 8월 27일)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 1위 후보: 전두환 (무소속) - 99.4%
    • 제3후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특징: 5.17 쿠데타 이후 치러진 선거로, 사실상 전두환 단독 출마 형식이었으므로 제3후보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 제12대 대통령 선거 (1981년 2월 25일) - 대통령선거인단 간선
    • 1위 후보: 전두환 (민주정의당) - 90.1%
    • 2위 후보: 유치송 (민주한국당) - 7.7%
    • 제3후보: 김종철 (민권당) - 1.6%
    • 출마 원인: 5공화국 초기 선거로, 사실상 전두환의 당선이 확정된 가운데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다른 후보들의 득표율은 미미했습니다.
      김종철
  •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7년 12월 16일) - 직선제
    • 1위 후보: 노태우 (민주정의당) - 36.64%
    • 2위 후보: 김영삼 (통일민주당) - 28.03%
    • 제3후보: 김대중 (평화민주당) - 27.04%
    • 출마 원인: 6월 민주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첫 선거였습니다. 민주화의 염원을 안고 김영삼, 김대중 두 거물 야당 후보가 독자 출마하면서 야권 분열이 일어났고, 이는 당시 여당 후보였던 노태우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대중
  •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 - 직선제
    • 1위 후보: 김영삼 (민주자유당) - 42.0%
    • 2위 후보: 김대중 (민주당) - 33.8%
    • 제3후보: 정주영 (통일국민당) - 16.3%
    • 출마 원인: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경제 성장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경제 대통령'을 내세우며 출마했습니다. 거대 양당 후보가 아닌 제3지대 후보로서 상당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거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정주영
  • 제15대 대통령 선거 (1997년 12월 18일) - 직선제
    • 1위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 40.27%
    • 2위 후보: 이회창 (한나라당) - 38.74%
    • 제3후보: 이인제 (국민신당) - 19.2%
    • 출마 원인: IMF 외환 위기 직후 치러진 선거로, 여권 내부의 분열이 심했습니다. 이인제 후보는 당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합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배한 후 탈당하여 독자 출마했습니다. 젊은 층과 변화를 열망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이는 이회창 후보의 낙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인제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12월 19일) - 직선제
    • 1위 후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 48.9%
    • 2위 후보: 이회창 (한나라당) - 46.6%
    • 제3후보: 권영길 (민주노동당) - 3.9%
    • 출마 원인: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양당 체제에 대한 비판과 노동자의 권익, 사회 양극화 해소 등을 내세우며 독자적으로 출마했습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던 시점이었고, 권영길 후보는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으나 진보 의제를 선거 전면에 부각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권영길 후보의 득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권영길
  •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7년 12월 19일) - 직선제
    • 1위 후보: 이명박 (한나라당) - 48.7%
    • 2위 후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 26.1%
    • 제3후보: 이회창 (무소속) - 15.1%
    • 출마 원인: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패배한 이회창 전 총재가 독자적으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보수 표심을 분열시켰습니다. 
      이회창
  • 제18대 대통령 선거 (2012년 12월 19일) - 직선제
    • 1위 후보: 박근혜 (새누리당) - 51.55%
    • 2위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 48.02%
    • 제3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 0.23%
    • 출마 원인: 진보 정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시 보수-진보 양강 구도가 매우 뚜렷했고, 이정희 후보는 TV 토론 등에서 강한 발언으로 주목받았으나 득표율은 매우 낮았습니다. 당시 안철수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가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하여 사퇴했기 때문에, 안철수 후보가 제3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단일화되어 후보로 남지 않았습니다.
      이정희
  •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7년 5월 9일) - 직선제
    • 1위 후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 41.08%
    • 2위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 24.03%
    • 제3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 21.41%
    • 출마 원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진 조기 대선으로, 정치 개혁과 새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층의 지지를 흡수하려 했습니다.
      안철수
  • 제20대 대통령 선거 (2022년 3월 9일) - 직선제
    • 1위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 48.56%
    • 2위 후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 47.83%
    • 제3후보: 심상정 (정의당) - 2.37%
    • 출마 원인: 거대 양당 후보의 비호감도가 높았던 선거로, 심상정 후보는 진보 정당의 대표 주자로서 출마했으나, 거대 양당 간의 초박빙 승부 속에 유의미한 득표를 얻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선거 막판 안철수 후보(당시 국민의당)가 윤석열 후보와 단일화하여 후보직에서 사퇴했습니다. 만약 단일화되지 않았다면 안철수 후보가 높은 득표를 기록하며 제3후보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상정

당선 가능성 0%인데 왜? 제3후보 출마의 숨겨진 진짜 이유

이제 다시 21대 대선의 이준석 후보, 그리고 수많은 역대 제3후보들의 질문으로 돌아와 볼까요? 왜 그들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 선거라는 거대한 무대에 뛰어드는 것일까요? 단순히 '이름 알리기'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의 행보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메시지 전달과 의제 설정'에 있습니다. 대선이라는 전국적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무대를 통해, 후보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 정책, 비전들을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킬 수 있습니다. 거대 양당이 외면하는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기존 정치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이는 당장 정권을 잡지 못하더라도, 사회 전반의 논의를 이끌고 미래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또한, '정당 및 세력 확장의 기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군소 정당에게 대선 출마는 정당의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당원 수를 늘리며, 향후 총선이나 지방선거 등 다른 선거에서 조직적 기반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대선 과정을 통해 뜻을 같이하는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거나 기존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죠.

 

심지어 '정치적 영향력 확보와 협상력 증대'라는 실리적인 목표도 존재합니다. 비록 당선은 어렵더라도,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 차기 정부의 정책 방향에 목소리를 낼 수 있거나, 특정 연대 및 단일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안철수 후보의 사례처럼, 대선 출마를 통해 얻은 인지도와 지지세를 바탕으로 다음 선거에서 개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거나 정당의 의석 확보에 기여하는 전략적인 판단도 이루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와 명예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 출마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경험과 경력이 되며, 이는 향후 정치 활동의 큰 자산이 됩니다. 특정 역사적 순간에 자신의 이름으로 대선에 출마했다는 기록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정치인들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선거 비용 보전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 등록에는 막대한 기탁금이 들지만, 일정 득표율 이상을 기록하면 이 비용을 보전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3후보의 대선 출마는 단순히 '당선'이라는 단일 목표를 넘어섭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 전달, 정당 성장, 정치적 영향력 확대, 그리고 개인의 정치적 포부 실현이라는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험난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들의 도전이 대한민국 정치의 지형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앞으로도 우리는 이들의 행보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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